주일 아침, 김천 아천제일교회 예배당에 찬송이 울려 퍼진다. 성도들의 찬송을 받쳐주는 피아노 앞에는 김천예술고등학교 설립자 이신화(李信和) 집사가 앉아 있다.
세월은 그의 모습을 더욱 깊고 고고하게 만들었지만 건반 위에 올려놓은 두 손에는 여전히 힘이 있다. 한 음 한 음 빚어내는 선율은 이제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고 감사이며,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온 한 예술인의 신앙고백이다.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현재 아천제일교회 1부 예배 반주자로 매주 피아노 앞에 앉는다. 화려한 무대도, 박수도 없다. 그러나 성도들의 찬송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할 수 있도록 묵묵히 건반을 누른다.
■ ‘사람에게 들려주는 음악’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음악’으로
그의 긴 음악 인생에서 피아노는 그렇게 새로운 의미로 이어지고 있다.
1942년생인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김천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젊은 시절 더 큰 도시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연주자 한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이 가진 음악과 교육의 꿈을 후배 세대에게 물려주는 길을 선택했다. 한일여자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이후 김천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며 김천은 물론 경북 예술교육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86년 문을 연 김천예술고는 지방 중소도시에서도 뛰어난 예술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신화 설립자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 교육의 지평을 넓히며 수많은 제자에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줬다.
2001년 당시 이신화 교장은 김천예술고를 소개하면서 음악과와 조형예술과를 통해 전국의 우수한 예술 인재를 선발하고, 실기뿐 아니라 예술인으로서 갖춰야 할 인격을 기르는 교육에 힘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의 교육철학도 남달랐다. 교육은 성적이 좋은 학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일이라는 신념이었다.
어려움을 겪던 학생을 받아들이는 데 교사들의 우려가 컸을 때에도 그는 “이런 학생을 받아서 잘 가르치는 것이 미션스쿨인 우리 학교가 할 일”이라며 책임을 자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세운 학교에서는 수많은 학생이 꿈을 키웠다. 가수 아리스 김호중을 비롯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래피티 작가 심찬양(Royyal Dog) 등 김천과 예술계를 빛내는 인재들도 배출됐다.
돌이켜보면 이신화 설립자는 음악을 가르치기에 앞서 사람을 가르쳤고, 사람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았던 교육자였다.
■ 수천 명의 제자를 가르친 손, 이제 찬송을 연주하다
평생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의 손은 이제 예배가 있는 날이면 아천제일교회 피아노 건반 위에 놓인다. 젊은 시절의 피아노가 예술을 향한 열정이었다면 지금의 피아노에는 감사와 신앙이 더해졌다.
교회 반주는 독주회와 다르다. 반주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들의 목소리를 받쳐주고, 찬송과 기도가 하나님께 향하도록 돕는 자리다. 그래서 이신화 집사의 연주는 더욱 특별하다.
긴 세월 동안 피아노를 놓지 않았다는 사실도 귀하지만, 매주 정해진 시간 예배당에 나와 성도들의 찬송을 위해 건반 앞에 앉는다는 것은 단순한 연주 활동을 넘어선다.
그것은 봉사이며 사명이고, 음악으로 드리는 예배다.
피아노 건반은 88개다.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그 검고 흰 건반 사이에서 한평생을 살아왔다. 젊은 날에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찾았고, 교육자가 된 뒤에는 제자들의 꿈을 찾았으며, 인생의 원숙한 자리에 이른 지금은 그 건반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찬송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이 나이까지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죠”
오랜 세월 음악과 함께한 연주자들에게 음악은 어느 순간 직업이나 취미를 넘어 삶 그 자체가 된다. 이신화 피아니스트에게도 나이는 음악을 내려놓아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깊은 연륜에 이른 지금까지 두 손으로 건반을 누르고, 귀로 찬송을 듣고, 성도들과 호흡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이고 감사다.
그의 연주에는 젊은 연주자의 화려한 기교와는 또 다른 울림이 있다. 음악가와 교육자로 살아온 세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기억, 삶의 희로애락을 지나오며 더욱 깊어진 신앙이 한 음 한 음에 함께 실려 나오기 때문이다.
■ 평생의 스승, 오늘도 학교로 향하다
이신화 피아니스트의 삶이 더욱 특별한 것은 그의 시간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김천예술고등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는 지금도 명예교장으로 학교에 출근한다.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후배 교직원과 학생들을 만나며 예술교육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이신화 명예교장은 여전히 자신이 평생 걸어온 교육과 음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후배와 제자들을 바라보고, 주일이면 교회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은퇴’라는 말보다 ‘계속’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예술에는 정년이 없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도 나이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제자에게 음악을 가르쳤다면 이제는 자신의 뒷모습으로 가르치고 있다.
아침이면 학교로 향하고, 주일이면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친다. 성도들의 찬송이 그의 건반을 따라 예배당을 채운다. 평생의 스승이 말없이 보여주는 그 모습 자체가 또 하나의 교육이며, 때로는 긴 설교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 “아직 시간이 많다”…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나이는 숫자로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지만, 그 숫자가 그 사람의 남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신화 피아니스트에게 지나온 세월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다. 학교에 갈 수 있고, 제자를 만날 수 있고,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릴 수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오늘이 그에게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래서 그의 삶을 바라보면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아직 시간이 많다”
더 가르칠 시간이 있고, 더 연주할 시간이 있으며, 더 감사할 시간이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그가 주일마다 피아노 앞에 앉는 모습은 후배 음악인과 제자들에게도 특별한 메시지가 된다. 예술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수단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자신이 받은 재능을 더 귀한 곳에 쓰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삶은 과거의 화려한 이력을 돌아보는 회고가 아니다. 오늘도 학교와 교회를 오가며 교육과 음악,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 교육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복음으로
이신화 피아니스트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의 길이 보인다. 사람을 키우고,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돌려주는 삶이다.
학교에서는 교육으로 사람을 키웠고, 예술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었다. 그리고 지금은 찬송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다.
그가 평생 심어온 예술의 씨앗은 김천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김천예술고등학교는 그가 남긴 큰 교육적 자산이며, 그 학교를 거쳐 세상 곳곳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는 수많은 제자는 그의 삶이 남긴 또 하나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신화 피아니스트가 앞으로도 계속 완성해 가고 싶은 작품은 어쩌면 따로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송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예배가 시작되기 전 피아노 앞에 앉는다. 성도들이 찬송가를 펴면 원숙한 피아니스트는 조용히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린다. 전주가 시작되고 예배당에 찬송이 번지면 그의 손끝도 함께 기도한다.
이제 그에게 무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수백 명이 박수를 보내는 공연장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교회의 피아노 한 대와 하나님을 향해 함께 찬송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다. 연주할 수 있는 오늘이 있고, 다시 건반 앞에 앉을 다음 주일이 있으며, 하나님께 감사할 또 하나의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소망도 한결같다.
“하나님께서 제게 연주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시는 그 순간까지 피아노로 찬송하고 싶습니다.”
평생 음악으로 사람을 가르쳤던 스승이 이제 그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천제일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이신화 집사의 피아노 소리가 단순한 반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의 찬송에는 한평생의 배움과 가르침이 있고, 감사가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믿음이 있다.
그에게 피아노는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에 감사하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달란트의 봉헌’이다.
에디터 : 梨泉 김윤탁